믿음의 역사

대동강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다.

믿음의 길 2025. 4. 17. 08:00

평양 대동강에서 뿌려진 순교의 피, 동양의 예루살렘을 일으키다

대한민국은 세계 선교 역사 속에서도 특별한 길을 걸어온 나라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헌신이 있었고, 그들의 순교의 피는 민족 복음화의 씨앗이 되어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에 개신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로 평가받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그 이후 일어난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 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1832년, 감자를 심은 첫 선교사 칼 귀츨라프

개신교의 조선 전래는 1832년 독일계 유태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동인도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남도 보령 앞바다 고대도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귀츨라프는 의사이자 통역사로, 선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주민을 위한 의료 및 농업 지원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감자 100개를 심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이는 조선에서 감자 재배법이 전파된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순교 여정

본격적인 선교의 시작은 영국 웨일즈 출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는 뛰어난 언어능력과 신앙심을 지닌 청년이었고,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나 선교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토마스 선교사 역시 선교책임자와의 갈등 끝에 사직한 뒤 조선 선교를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게 됩니다.

 

1864년, 중국 산둥성에서 조선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문 성경을 준비하여 조선 해안을 따라 성경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는 두 달 반 동안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며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부인 고드프리, 영국 하노버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로버트 토마스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그리고 시작된 기적

1866년, 조선은 대원군의 주도로 천주교 박해가 극심해지던 시기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사로 승선하여 조선으로 향합니다. 이 배에는 한문 성경 수레 여러 대 분량이 실려 있었고, 그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배가 조선군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 불타는 배 위에서 성경을 물가로 던지며 외쳤습니다:

 

"야소를 믿으세요!"

 

그는 곧바로 붙잡혀 대동강변 쑥섬에서 처형당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성경을 건네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에게서 성경을 받은 처형자 박춘권은 훗날 그 기억을 간직하고 살다가, 1899년 마펫 선교사에게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안주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박춘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래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 받아왔다."

 

                    평양 대동강에서 불타는 배에서 성경을 던지며 복음을 전한 토마스 선교사와 박춘권


 

성경으로 도배된 집, 교회의 시작이 되다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은 소년 최치량의 손에 들어갔고, 그는 이를 관리 박영식에게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집 안 벽지로 사용했고, 세월이 흘러 최치량은 그 집을 인수하여 여관으로 개조합니다. 놀랍게도, 그 여관이 바로 후일 장대현교회가 세워진 자리입니다.

 

당시 평양은 상업이 발달하고 풍속이 거칠기로 악명 높은 도시였으며, 조선에서 가장 타락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사역을 하던 마펫 선교사는 평양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으로 향합니다. 마펫이 평양에 도착해 처음 묵은 곳이 바로 최치량이 운영하던 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관의 방 안은 놀랍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전한 한문 성경책으로 도배된 상태였습니다. 물자가 부족하던 당시, 벽지를 대신해 사용된 것이었지만, 마펫 선교사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 방을 평양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기로 결심하고, 이후 이 여관 자리에 장대현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 감동적인 만남과 계시는 평양 복음화의 시작점이 되었고, 마침내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영적 부흥의 도가니로 들어서게 됩니다.

 

대동강 쑥섬에서 붙잡힌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한 박춘권은 회개 했고 마펫 선교사를 도와 장대현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피가 사랑과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였고 평양을 회개의 불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

 

교회의 영수가 된 박춘권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당시는 장로 제도를 정착시키기 어려운 선교 초기의 시대였으며,  교회의 모범이 될 만큼 영적 훈련이 되지 않아 선교사들은 그 역할을 대신할 평신도 지도자인 ‘영수’를 세워 교회를 이끌게 하였습니다. 


평양 대부흥의 불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인해 씨앗처럼 뿌려진 복음은 수십 년 후 놀라운 부흥의 열매를 맺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복음의 중심지가 됩니다. 당시 평양에는 10만 인구 중 세례교인만 2만 5천 명, 교회 수만 1,000개에 이르렀습니다.

 

장대현교회, 평양신학교, 이기풍 목사, 길선주 목사 등의 인물과 기관들이 등장하며 조선의 영적 각성과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마펫 선교사와 장대현 교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단순한 비극이 아닌,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였습니다. 당시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선교사가 입국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 하나님은 성경책이 먼저 조선 땅에 뿌려지는 선교의 길을 여셨고, 그 말씀은 평양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순교한 자리는 훗날 김일성이 교회를 헐고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자리로 바뀌었지만, 그 사실 자체가 오히려 복음의 영향력에 대한 북한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맺으며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복음을 뿌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한 권의 성경으로 평양 땅을 흔들었고, 그 땅은 이후 놀라운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순교의 씨앗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