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성경번역

믿음의 길 2025. 4. 28. 08:56

종교개혁의 시작, 성경 번역으로 시작되다.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철저히 독점했습니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존재했고, 일반 대중은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 되어 사제들이 성경을 독점 했습니다.

 

심지어 성당 미사 때는 성경책을 강대상에 쇠사슬로 묶어두어 사제들만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를 "Chained Bible"(쇠사슬 성경)이라고 부르며, 대중이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은 심각한 이단으로 취급 되어 화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존 위클리프  성경을 대중에게 돌려주다

이러한 성경독점과 대중의 성경접근권을 막은 카톨릭에 반기를 들은 인물이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였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에드워드3세의 지원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었던 궁정 사제 였었습니다. 그 또한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화형의 위험을 무릎 쓰고 성경번역에 나서게 됩니다.

 

존 위클리프는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대중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읽음으로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직접 신앙의 열매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은 모든 이의 것이며,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직접 읽고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이 종교개혁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교황보다 위에 있다

 

교회의 권위를 정면으로 비판한 그는 생전에는 많은 억압과 탄압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죽어서도 가톨릭 교회는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태워 강물에 뿌리는 모욕을 가했습니다.

 

불태워진 위클리프의 재는 영국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습니다. 그 뿌려진 재는 바다로 나가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는 마중물이 된 것입니다.

 

존위클리프를 따르는 롤라드파는 위클리프가 번역한 쪽본 성경을 품에 안고 영국 전역을 돌며 성경을 읽지 못하는 농부와 노동자, 아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 번역의 순교자 윌리엄틴들

존 위클리프 순교 100년 후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태어났고 위클리프의 뒤를 이어 헬라어 원문에서 직접 영어로 성경을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번역을 시작하며 다짐했습니다.

 

"농부 소년조차 주교보다 성경을 잘 알게 만들겠다"

 

영국교회의 강력한 반대와 이단으로 지목 되어 극심한 탄압을 당하게 된 윌리엄 틴들은 독일 망명을 시작으로 유럽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와 보름스 등지를 전전하며 비밀리에 인쇄소를 옮겨 다니며 신약성경을 인쇄 하였으며 수차례 발각 될 위기를 겪었습니다.

 

윌리엄 틴들에 의해 번역 된 성경은 몰래 영국으로 반입되어 대중에게 유포 되었지만 영국 교회는 이를 수거하며 불태웠습니다. 영국 교회로부터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 된 윌리엄 틴들은 유럽 전역을 도망 다니고 숨어지내며 성경번역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밀고자의 배신으로 체포 된 윌리엄 틴들은 1536년 빌보르드(Vilvoorde) 감옥에서 목이 졸리고, 이어서 화형당하는 형을 받았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그리고 기도를 이어 갔습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윌리엄 틴들의 번역은 이후 킹제임스 성경(KJV, 1611)의 토대가 되었으며, 영어권 기독교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백조(루터)가 올 것을 예언한 얀 후스

얀 후스(Jan Hus, 1369~1415)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였습니다.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대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습니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따른 모라비안 교회 또는 모라비안 형제단은 독일로 이주하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회개와 대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24시간 기도운동을 시작하여 이 기도운동은 무려 100년간 이어졌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자발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선교를 국가 주도로 하거나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얀 후스가 남긴 모라비안 공동체는 평신도 선교사를 스스로 파송하며 최초의 세계 선교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얀 후스는 성경 번역으로 화형당하기 전 예언을 했습니다.

 

"너희는 지금 한 마리 거위를 잡는다. 그러나 100년 후, 너희는 백조를 잡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100여 년 후 등장할 종교개혁의 중심에 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예견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위클리프, 틴들, 후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교개혁의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직접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루터의 1517"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게시하며 시작 된 종교개혁의 거대한 불길은 성경번역으로 시작 된 종교개혁 정신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Worms, 1521)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성경에 의해 사로잡혔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의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따른 오직 성경, 오직 말씀의 종교개혁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언은 성경을 읽은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며 그들은 모두가 제사장이며, 종교개혁 정신의 만인제사장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로 종교개혁의 마침표를 찍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제자들과 동료들이 주도하는 프랑스어 제네바 성경(La Bible de Genève) 번역을 지원하였습니다.

 

칼뱅은 성경 주석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기독교 강요를 통해 단순히 성경번역와 오류를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루터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은 타올랐지만, 정리된 교리 체계나 신학적 토대가 미비했습니다. 지역별로 신학이 달랐고, 이로 인해 신학적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오직 성경에 따른 신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 운동이 아니라, 성경을 통한 신앙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었고, 칼뱅은 성경 해설서를 집필하여 성경 중심 신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과 말씀을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말씀에 기반한 신앙을 찾게 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싸움 덕분이었습니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